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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주산성Ⅱ(高靈 主山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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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적 명고령 주산성 정비복원사업부지내 유적 문화재청 허가번호제2014-0703호
유적위치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지산리 산54-1번지 일원 발굴유형정밀발굴
조사기간2014.11.10. ~ 2015.07.31.
조사면적21,890.8㎡
유적종류산성 유    형대가야시대 1차 성벽, 대가야 이후 2차 성벽, 고려시대 이후 3차 성벽, 대가야 목곽고
시    대대가야, 고려
내    용

사적 고령 주산성(高靈 主山城)은 추정 남문지 주변에 대한 제1차 발굴조사를 통해 6세기 전반 대가야시대에 축조된 석축산성임을 확인한 바 있었다. 6세기대 대가야의 상황으로는 대규모 석축산성의 축조가 불가능했다는 논란을 완전히 불식시키는 계기가 되었었다.

이와 더불어 주산성 보다 선축된 석축이 일부 확인되어, 6세기 보다 이른 시기에 산성이 축조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그래서 기존에 알려진 내성과 외성의 접합부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여 내·외성의 구조 및 축조시기에 대한 선후 관계 등을 명확히 확인하고자 이번 제2차 발굴조사를 진행하게 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선축된 석축과 관련된 유구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세 차례의 산성 성벽 축조 양상이 확인되었다. 기존 외성으로 알려졌던 1차 축조 성벽과 그 이후에 축조된 2차 축조 성벽(내성) 그리고 고려시대 이후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3차 축조 성벽이 조사범위 내에서 중복된 상태로 확인되었다.

2차 성벽은 기존 1차 성벽의 북벽을 일부 이용하여 주산성의 9부 능선을 따라 장타원형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축조방법은 1차 성벽과 큰 차이는 없었으나, 굳이 비교하자면 외벽 면석 하단에 구축되어 있었던 보강토와 보강석 등 보강시설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2차 성벽이 1차 성벽의 일부를 활용하여 새롭게 성벽을 구축한 양상은 확인되었지만, 그 축조시기는 분명하게 밝힐 수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3차 성벽은 일제강점기 이후 내성의 무너진 성돌로 인식되고 있었던 성벽이다. 현재는 지표상에서 그 흔적을 쉽게 확인할 수 없지만, 약 100년 전인 1915년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사진(보고서 삽도11-①②)을 보면, 그 무너진 석군이 분명하게 확인된다. 3차 성벽은 2차 축조 성벽의 상단부에 담장처럼 폭을 좁게 협축식으로 구축한 성곽의 한 형태였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고려시대 이후 몽골의 침략에 대비한 입보농성(立保籠城)용 성곽을 새롭게 축조한 것은, 이전에 축조된 성벽은 이미 사용되지 않고 폐기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주산성 내부시설을 확인하기 위한 시굴조사를 통해서는 성내 임시 거주 기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계단식으로 조성된 좁은 공간들이 확인되었으며, 지하식 대규모 저장시설도 확인되었다. 산성내에서 출토되는 유물 특히, 다량의 기와편과 전(塼) 등이 출토되는 양상으로 보면 주요한 건물이 성내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은 되지만, 아직까지는 대규모 건물의 흔적은 명확히 확인할 수 없었다.

 

이번 발굴조사의 가장 큰 성과로는 첫째, 기존 내·외성 구조의 이중 복곽성으로 알려진 성벽의 구축양상이 복곽성이 아닌 단곽성이며 각각 개축되어 새롭게 조성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는 점이다. 다만 6세기 전반에 조성된 1차 성벽을 수축하여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것인데, 굳이 북사면의 성벽은 그대로 이용하면서 그 규모를 줄여서 성벽을 개축한 이유는 당시의 정치·군사적 이유에서인지 아니면 축조시기의 차이에 의한 것인지는 앞으로 추가적인 조사를 통하여 2차 성벽의 축조연대를 어느 정도 가늠한 이후에는 분명히 언급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다음으로는 성내 필수 시설인 저장창고의 발견이다. 지하식 목곽고로 확인된 이 시설은 성내 거주자들에게는 중요한 시설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시설이 백제지역의 지하식 저장시설인 목곽고와 아주 유사한 점은 그 동안 주로 고분이라는 한정된 자료를 통해 진행되어 왔던 대가야 역사 복원의 연구 범위를 확장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