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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현리 351유적(英陽 縣里 351遺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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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적 명영양 공설운동장 진입로 개설공사 부지내 유적 문화재청 허가번호제2014-0142호
유적위치경상북도 영양군 영양읍 현리 351번지 일원 발굴유형시굴, 정밀발굴
조사기간2014.02.26. ~ 2014.06.20.
조사면적시굴: 2,088㎡, 정밀발굴: 1,795㎡
유적종류생활유적 유    형통일신라시대 와요, 고려시대 건물지, 석축, 수혈, 조선시대 건물지, 구
시    대통일신라, 고려, 조선
내    용

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 기와가마 1기, 고려시대 건물지 1기, 석축 2기, 수혈 2기, 조선시대 건물지 2기, 구 1기 등 9기의 유구가 조사되었고, 유물은 통일신라시대 기와가마에서 토기파수부편, 수키와편, 암키와편 등이 출토되었고, 고려~조선시대 유구에서 토기 구연부, 토기 저부, 청자편, 분청자편, 백자발, 암키와편, 수키와편, 암막새편, 수막새편 등 총 142건 143점이 출토되었다.


통일신라시대 기와가마는 구릉의 사면에 등고선 진행방향과 직교되게 1기가 조성되었다. 반지하식의 구조로 연도부 상부는 삭평되었으나, 소성실과 연소실 등은 양호하게 남아있는 상태였다. 내부에서 출토된 기와편과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결과 등의 자료를 검토하였을 때 조업시기는 9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석축은 조성형태나 방법의 상이점으로 보아 조성시기는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되며, 석축의 조성은 건물지 조성에 필요한 공간확보를 위한 축대시설의 기능과 노재골과 이어지는 작은 천변의 호안석축의 기능 등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고려시대 건물지와 수혈 등은 전체적인 양상을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이 일대의 지명이 현리(縣里)이고, 고려시대에 이곳에 영양현의 치소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지역임을 고려하면, 유적에서 확인된 건물지 등은 당시의 치소지와 관련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아울러 공민왕 7년(1358)에 왜구의 침탈로 당시 치소지가 소실되었고 이 후 300년 동안 관아를 세우지 못하고 있다가 조선 숙종 2년(1676)에 현재 군청자리에 관아를 짓기 시작하였다는 문헌내용을 통해, 건물지의 폐기 시점은 14세기 중반 어느 시점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건물지의 노출과정에서 소토와 숯 등 화재가 일어난 흔적이 확인되는 것과 그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시대 건물지와 구는 잔존상태가 매우 양호하지 않았기 때문에 건물의 전체적인 양상을 파악하기는 어려운 상태였으나, 고려시대 건물지가 폐기되고 일부 퇴적이 이루어진 다음 어느 시점에 다시 조선시대 건물지가 조성된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14세기대에 치소지가 소실된 후 공지로 남아 있다가 17세기에 이르러 다시 생활터전의 일부가 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었다.